이탈리아 토스카나의 작은 마을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1999년 한 무리의 시장들이 모여 선언문에 서명했을 때, 누구도 그것이 세계의 도시 설계를 바꾸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치타슬로(Cittaslow)’, 즉 느린 도시 운동. 패스트푸드에 맞서 시작된 이 작은 저항은 사반세기 동안 30개국 290여 개 도시로 번졌다. 흥미로운 역설은 여기 있다. 느림을 표방한 이 운동이, 누구보다 빠르게 전 세계로 도착했다는 것이다.
이 역설을 가속한 결정적 사건은 팬데믹이었다. 2020년 도시의 출근길이 멈추자, 사람들은 평생 지나치기만 하던 자기 동네를 처음으로 걸어서 들여다보게 됐다. 통근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 동네 빵집과 골목 공원이 들어섰다. 도시의 리듬은 도심의 고층 사무실에서 주거지의 보행로로 재편됐고, 그 변화는 회복기에도 되돌아가지 않았다.
15분 안의 삶
이 흐름에 이론의 옷을 입힌 인물이 소르본 대학의 카를로스 모레노 교수다. 그가 제안한 ’15분 도시’는 단순하다. 집에서 걷거나 자전거로 15분 안에 일·교육·의료·장보기·여가를 모두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파리 시장 안 이달고는 이를 2020년 재선 공약의 중심에 세웠고, 학교 앞 도로를 ‘아이들의 거리’로 바꾸며 차량을 몰아냈다. 멜버른은 ’20분 동네’를, 포틀랜드는 ‘완결된 동네’를 내걸며 같은 철학을 변주했다.
이 발상이 전혀 새로운 것은 아니다. 1960년대 도시계획가 제인 제이콥스는 이미 거대한 고속도로와 단일 용도 구획이 도시의 생명을 죽인다고 경고했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짧은 블록, 다양한 용도가 뒤섞인 거리, 보행자가 만들어내는 ‘거리의 눈’이었다. 15분 도시는 반세기 늦게 도착한 그의 복권에 가깝다. 자동차를 위해 설계됐던 20세기 도시가, 다시 사람의 보폭에 맞춰 재단되기 시작한 것이다.
핵심은 거리(距離)가 아니라 시간이다. 이동에 쓰던 시간을 회수해 삶에 돌려주자는 발상이다. 그 시간은 통근 지옥철에서 빠져나와 동네 카페의 단골이 되고, 옆집 이웃의 이름을 알게 되는 데 쓰인다. 속도를 줄이자 관계의 밀도가 올라갔다. 한 도시정책 연구에 따르면, 평균 통근 시간이 길수록 주민의 지역 모임 참여율과 이웃 신뢰도가 낮아지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길에서 흘려보내는 시간이 곧 공동체에서 빠져나가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로컬의 재발견
경제 지형도 따라 움직였다. 재택근무로 사람들이 낮 시간을 동네에서 보내자, 도심 대형 상권은 휘청인 반면 주거지의 작은 가게들이 살아났다. 서울의 망원동과 연남동, 도쿄의 시모키타자와 같은 동네가 거대 쇼핑몰이 아니라 걸어서 닿는 골목 상점들로 활기를 띤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소비자들은 익명의 효율 대신 얼굴을 아는 거래를 택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물리적 골격도 바뀌고 있다. 파리는 팬데믹 기간 임시로 깔았던 자전거 도로를 영구 시설로 전환했고, 바르셀로나는 여러 블록을 묶어 차량 통행을 막고 보행자에게 돌려주는 ‘슈퍼블록’ 실험을 도시 전역으로 넓혔다. 한 블록 안의 광장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고 노인들이 벤치에 앉는 풍경은, 불과 몇 해 전까지 주차장이었다. 속도를 늦춘 자리에 비로소 삶이 들어선 셈이다.
느린 도시가 추구하는 변화는 대체로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 차도를 줄이고 보행로와 자전거 길을 넓히는 공간의 재배분
- 대형 체인 대신 지역 생산자와 로컬 상점의 생태계 복원
- 이동 시간의 절약을 통한 공동체 관계와 여가의 회복
느리게 산다는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선택이다. 무엇을 위해 속도를 냈는지 잊어버린 도시에서, 그 질문을 되찾는 일이다.
물론 그늘도 있다. 걷기 좋은 동네는 곧 집값이 오르는 동네가 되어, 정작 그곳에 살던 이들을 밀어내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위험을 안고 있다. 느린 도시의 진짜 시험은 풍경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느림을 누가 누릴 수 있는가라는 형평의 문제일 것이다. 빠르게 도착한 변화 앞에서, 도시는 이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을 묻고 있다.